작가 이상
이상은 일제강점기의 대표적인 모더니즘 문학 작가이자, 시인이자 소설가이다.
이상은 당대의 문학에 있어 파격적인 형식과 내용을 고수한 것으로 유명하다.
주로 의식의 흐름 기법, 이상한 문체와 난해한 상징, 자기 해체적 시도로 독창적인 문학 스타일을 가지고 있다.
이상과 권태
"권태"는 그런 이상의 소설 중 하나로, 삶의 무의미함과 감각적 피로감, 현대인의 존재 불안을 형상화한 작품이다.
일반적인 문학에서 볼 수 있는 전통적인 플롯이나 서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책 중 주인공의 내면 독백과 의식적인 흐름으로 소설은 진행된다.
작 중 이상은 권태를 정의하는 주인공을 통해 일상이 어떻게 인간 존재를 침식시키며, 일상이 현대인의 내면이 얼마나 병들게 만들 수 있는지에 대해 극단적으로 형상화해 그가 정의한 "권태"를 독자들에게 전달한다.
권태
권태(倦怠) : 어떤 일이나 상태에 시들해져서 생기는 게으름이나 싫증, 권태감이라고도 한다.
권태란 온갖 상황에서 발생할 수 있는 감정 중 하나로,
많이 접하고 마주하던 어떤 것에 대해 어느 순간 싫증이 나는 감정을 주로 의미한다.
이러한 권태감은 어떠한 일이나, 사물, 사람, 관계 등에서 자주 발생한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인생과 권태의 관계를 두고 아래와 같이 주장했다.
"인간의 욕망은 평생 채워질 수 없다. 인생은 결핍과 권태 사이를 오가는 고통의 바다다."
이는 인간이 어떠한 목표를 달성하면 그 목표가 가치를 상실하게 되고, 새로운 목표 달성을 위해 가슴이 뛰기까지의 (즉 결핍을 느낄 때까지의) 공백을 권태라 주장했다.
즉 쇼펜하우어가 말한 권태는 사람이 음식을 다 먹은 뒤 배부른 상태이며, 결핍은 그와 반대로 음식을 갈망하는 고통과 즐거움이 공존하는 상태와 같은 것이다.
때문에 쇼펜하우어는 "인간은 풍족한 상태에서 권태라는 극심한 고통의 감정을 해소하기 위해 도리어 적당히 결핍된 상태로 고난과 고통이 반복되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라고 얘기한다.
이상이 말하는 권태
이상이 말하고자 한 권태는 단순한 나른함의 수준을 넘어선 권태이다.
불나비가 달려들어 불을 끈다.
불나비는 죽었든지 화상을 입었으리라.
그러나 불나비라는 놈은 사는 방법을 아는 놈이다.
불을 보면 뛰어들 줄도 알고,
평상에 불을 초조히 찾아다닐 줄도 아는 정열의 생물이니 말이다.
그러나 여기 어디 불을 찾으려는 정열이 있으며,
뛰어 들 불이 있느냐?
없다.
나에게는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없는 내 눈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암흑은 암흑인 이상,
이 방 좁은 것이나 우주에 꼭 찬 것이나 분량상 차이가 없으리라.
나는 이 대소 없는 암흑 가운데 누워서
숨 쉴 것도 어루만질 것도 또 욕심나는 것도,
아무것도 없다.
다만 어디까지 가야 끝이 날지 모르는 내일,
그것이 또 창 밖에 등대하고 있는 것을 느끼면서
오들오들 떨고 있을 뿐이다.
"권태" 전문 中
전문에서 나온 불나비는 자기 자신을 고통 속에 태워서라도, 불이라는 목표를 향해 돌진하는 존재이다.
즉, 이상은 살아있다는 것은 "고통을 감수하더라도, 어딘가를 향해 뛰어드는 것" 임을 달하고자 한다.
반면 "권태"의 주인공은, 불나비와 같이 불을 찾고자 하는 정열도 없으며, 뛰어 들 불도 없다.
그의 세계에서 그는 무언가를 갈망하는 능력조차 사라졌으며,
이는 주인공에게는 삶을 움직이는 본능적인 충동 자체가 사라진 상태임을 의미한다.
말 그대로 권태에 절여진 주인공의 존재 자체가 아무것도 아니고,
그를 찾지 않는 세상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라는 절망적인 인식을 그대로 투영한다.
일제강점기, 민족의 탄압과 같은 시대적인 배경을 타고 태어난 이상은,
"권태"라는 소설을 출간하며 사회가 얼마나 인간 개인을 고립시키고 병들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해 권태라는 감정을 빌려 독자들에게 얘기하고 싶어 했다고 생각한다.
또한, "권태" 를 통해 우리에게 삶의 의미는 무엇이며, 살아 있다는 것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행복은 찾고자 하면 할수록 멀어진다.
여기서부터는 작성자의 주관을 포함해서 작성했습니다.
삶은 "행복의 연속" 과는 거리가 멀다.
오히려 "문제와 이를 해결하기 위한 고뇌의 연속"이라는 말이 좀 더 삶과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인간은 삶의 의미를 찾기 위해 평생을 고통 속에 사는 생물이다.
반면, 모든 것이 갖춰져 있고 충족된 인간이더라도, 권태라는 비합리적인 감정이 생기기 마련이다.
이 비합리적인 감정은 본인을 다시 결핍된 상태로 끌고 내려가려고 하기 때문에,
도리어 인간은 행복보다는 고통을 추구하는 존재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행복 또한 그렇다.
인간은 나 자신을 행복하게 만드는 것을 찾고 이를 행하려고 노력한다.
하지만 그러한 행복의 성취가 반복되면 어느 순간 그 행복은 예전의 나를 최대한 행복하게 해 줬던 그 시절의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다.
마치 가장 맛있게 먹었었던 음식을 또 먹고, 또 먹고, 먹다 보면
'아, 이제는 옛날만큼 맛있지 않다' 라고 느낄 수도 있는 것과 같이 말이다.
이처럼 인간은 끝없이 갈망하는 간사한 존재이다.
따라서 우리는 건강하게 삶의 의미와 행복을 추구하기 위해
진정으로 나를 행복하게 하는 것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마치 "권태"의 불나비가 그랬듯
불을 쫓기 위해 어느정도 내 몸을 그을릴 정도로 고통스러울 각오는 해야 할 것이며,
또한 행복의 충족이 반복될수록 그에 따른 쾌감은 줄기에 이를 멀리하며 경계해야 할 것이다.
또한, 내가 마주하고 있는 행복이 영원할 수 없다는 자각을 하며
이를 위해 본인과 주변을 끊임없이 변화하고 갈고 닦아야한다.
인간은 그렇듯 행복하기 위해 고통받는 존재이다.
리뷰
이상의 「권태」는 고등학교 시절 수능 모의고사 문학 지문으로 처음 접했던 작품이다.
당시 어린 나는 그때 어떤 부분이 인상 깊었는지는 모르겠으나 권태 전문의 일부를 블로그에 아카이빙해 두기도 했다.
10년이 넘은 지금, 문득 '어떤 부분이 그렇게 마음에 와닿았을까?' 하는 생각에 다시 이 작품을 펼쳐보게 되었다.
삶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되돌아보고 사유할 수 있게 해 준, 여전히 좋은 작품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나름의 권태에 사무쳐 이 작품에 끌렸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의 나는 그때와는 또 다른 시선으로,
때론 권태롭고 싶다는 욕구에 사로잡힌 채로 퇴근길 지하철에서 이 책을 마주하며 나름의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소설의 분량이 약 6쪽 이내로 권태와 문학적 난해함과 실존주의적 해체에 대해 관심이 많은 분들은 퇴근길에 읽어봐도 좋을 책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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